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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괴산피씨(槐山皮氏)
    유래
     시조 : 피득창(皮得昌)
    시조 피득창(皮得昌)은 조선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괴산에 살면서 후손들이 홍천피씨에서 분관하여 괴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인물
    피득창의 아들 피강지가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피정과 증손 피소는 목사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피홍군, 통덕랑 피경송, 방어사 피동현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 외 통정대부(정3풍의 당상관 품계) 피종남과 판관 피세만, 통사랑 피세담이 유명했으며, 효자 피훈손, 통덕랑 피경우, 참봉 피봉준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 피강지(皮康芝) 조선 대 장령을 지냈다
    - 피정(皮釘) 조선 때 진사였다
    - 피소(皮燒) 조선 때 목사를 지냈다
    - 피정만(皮正滿) 조선조에 영장을 지냈다
    - 피홍군(皮洪君) 조선 때 판서에 올랐다.
    - 피경송(皮卿松) 조선 때 통덕랑을 역임하였다
    - 피능화(皮能和) 조선 때 관직이 첨사였다.
    - 피동현(皮洞鉉) 조선조에 방어사를 역임하였다.
    - 피천백(皮川栢) 조선 때 주부를 지냈다.
    - 피선원(皮宣源) 조선 때 목사를 역임하였다.
    - 피종남(皮宗南) 조선 때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 피세만(皮世萬) 조선 때 관직이 판관이었다
    - 피세담(皮世淡) 조선 때 통사랑을 역임하였다.
    - 피운손(皮雲遜) 조선조에 효행이 지극한 효자였다
    - 피경우(皮景祐) 조선 때 통덕랑을 지냈다.
    - 피봉준(皮鳳俊) 조선 때 참봉을 지냈다.
    항렬자
    16世
    경(景)
    17世
    예(禮)
    18世
    봉(鳳)
    19世
    호(浩)
    20世
    상(相)
    21世
    찬(燦)
    22世
    -
    23世
    -
    24世
    -
    25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17世孫은 16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
    괴산(槐山)은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금물노국(今勿奴國)과 잉근내군(仍斤內郡) 이었다. 고구려시대인 475년에는 잉근내현·상모현(上芼縣)·도서현(道西縣) 등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괴양현(塊壤縣)과 도서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괴주(槐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995년(성종 14)에는 괴주군(槐州郡)으로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으나 1018년(현종 9)에 충주목(忠州牧)에 편입되면서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분리하여 1456년(세조 2)에 괴산군(塊山郡)이라 고쳐 불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에 속하였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풍군(延豊郡)과 청안군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의 군을 이루었다. 1979년 괴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괴산피씨는
    1985년에는 586가구 2,413명, 2000년에는 693가구 2,204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569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