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 |
![]() |
|
www.rootsinfo.co.kr |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 ![]() ![]() |
![]() 진주하씨(晋州河氏, 진양)
유래
시조 : 하공진(河拱辰)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을 지내고 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진주 출생으로, 1010년(현종 1년)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 갔다가 거란군에게 잡혀갔다가 요(遼)나라 왕 성종(聖宗)의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진주하씨는 그 계통이 뚜렷하지 않은 대략 3파로 분파된다. [ 시랑공파(侍郞公派) ] 하공진을 시조로 하며 하공진, 하측충(則忠), 하탁회(卓回), 하정재(挺才), 하남수(南秀), 하소(邵), 하부심(富深), 하식(湜)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崙, 문충공)이 그 후손이다. [ 사직공파(司直公派) ] 고려 정종 때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며 하진, 하영상(永尙), 하맹공(孟恭), 하원경(元慶), 하백부(白富), 하의(義), 하보(保), 하직의로 되어 있으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演)은 하륜과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서로 계보를 상고(詳考)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 단계공파(丹溪公派) ] - 단계하씨 고려 때 주부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며 하성, 하희보(希甫), 하공정(公正), 하현(玄), 하윤(胤), 하지백(之伯), 하담(澹)으로 되어 있으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緯地)의 집안이다. 흔히 단계 하씨로 알려져 있으며 하담은 하위지의 부친이다. 진주하씨가 본관을 진주로 한것은 하공진의 11세손인 하륜이 진산부원군에 추봉되고, 하진(사직공파)의 9세손 하접이 진천부원군에, 10세손 하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진산, 진천은 모두 진주의 별호이다) 인물
- 하윤린 : 고려 충숙왕 때 순흥부사, 예의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하윤원(允源) :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 수복에 공을 세우고 우왕 때 대사헌이 되었다. - 하을지(乙沚) : 고려 때 전라도원수가 되어 왜선의 나포에 공을 세웠다. - 하경복(敬復) : 조선시대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로서 15년 동안 북방수비에 큰 공을 세웠다. - 하윤(潤) : 조선 성종 때 예문관검열을 지내고 임사홍(任士洪)의 서용(敍用)을 반대했다. - 하응림(應臨) :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진보(晉寶), 명종 때 당대의 '8문장' 으로 문명을 날렸다. - 하규일(圭一) : 구한말의 국악사(國樂士)로 중년 이후에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는데, 그는 무용에도 유능했으며 가곡의 정통을 지킨 사람이다. - 하난사(蘭史) : 여류 선각자로 미국 유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1919년에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하숙산(河叔山) : 문과(文科) 세조7년(1461) 별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하위지(河緯地) : 문과(文科) 세종20년(1438)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하억수(河億水)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별시 병과(丙科) 하형산(河荊山) : 문과(文科) 성종3년(1472) 춘당대시 병과(丙科) 하응임(河應臨, 1536 丙申生) : 문과(文科) 명종14년(1559) 정시 을과(乙科) 하계증(河繼曾) : 문과(文科) 연산군4년(1498) 식년시 병과(丙科) 하진선(河晉善, 1609 己酉生) : 문과(文科) 인조20년(1642) 식년시 병과(丙科) 하석홍(河錫洪, 1786 丙午生) : 문과(文科) 순조19년(1819) 식년시 병과(丙科) 하결(河潔) : 문과(文科) 태종11년(1411)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하진보(河晉寶, 1530 庚寅生) : 문과(文科) 명종10년(1555)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4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6명, 무과 32명, 생원진사시 73명, 율과 3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
진주(晉州)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하씨는
1985년에는 35,563가구 148,233명, 2000년에는 37,744가구 121,054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60,307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