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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현씨(星州玄氏)
유래
시조 : 현규(玄珪).
시조 현규(玄珪)는 조선 세종 때 군자감정(軍資監正)과 고부군수(古阜郡守)를 지냈다. 그의 선조는 현담윤(玄覃胤, 연주현씨의 시조)이며 그의 큰아들로, 역시 고려시대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뒤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진 현덕수(玄德秀)의 8세손이다. 시조 현규가 출세하게 되면서 그의 후손이 연주현씨에서 분관하여 오래도록 살아온 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물
시조 현규(玄珪)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현득리(玄得利)는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현간(玄侃)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현재흥(玄載興)은 사복사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선무랑(宣務郞) 현기(玄琦)의 아들인 현덕량(玄德良)은 선조 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으며 선조 37년에는 인동현감(仁同縣監)이 되었다. 희암(希菴) 현덕승(玄德升)은 현수(玄璹)의 아들이다. 그는 선조21년 진사(進士)가 되고, 선조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은 영조 때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외암(巍巖) 이동(李東)과 함께 낙론(洛論)에 속해 인과 물과 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고, 예론(禮論)에도 정통하여 '관봉문답(冠峰問答)' '관봉유고(冠峰遺稿)'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삼벽당(三碧堂) 현약호(玄若昊)는 참봉(參奉)을 지낸 현징(玄徵)의 아들로, 당대의 석학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위해 당액(堂額)을 썼으며, 학행(學行)으로 유명하였고, '병계집(屛溪集)'을 남겼다. 이외에도 효자로 알려진 현홍준(玄弘俊), 현응준(玄凝俊)이 있으며, 현정구(玄鼎龜)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지내 이름을 높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현덕승(玄德升,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23년(1590) 증광시 을과(乙科)
현진상(玄鎭商, 1779 己亥生) : 문과(文科) 순조10년(1810) 식년시 병과(丙科) 현재묵(玄在默, 1735 乙卯生) : 문과(文科) 영조44년(1768) 식년시 병과(丙科) 현봉점(玄鳳漸, 1697 丁丑生) : 문과(文科) 경종3년(1723) 식년시 병과(丙科) 현봉태(玄鳳泰, 1700 庚辰生) : 문과(文科) 영조20년(1744) 식년시 병과(丙科) 현정구(玄鼎龜, 1653 癸巳生) : 무과(武科) 숙종12년(1686) 별시 병과(丙科) 현응신(玄應臣, 1557 丁巳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을과(乙科) 현유후(玄裕後, 1599 己亥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인조2년(1624) 증광시 삼등(三等) 현태시(玄太始, 1527 丁亥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명종10년(1555) 식년시 이등(二等) 현경후(玄慶後, 1629 己巳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효종8년(1657)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22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5명, 무과 2명, 생원진사시 15명) 세거지
- 전남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 충남 천안군 일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현씨는
1985년에는 2,788가구 12,299명, 2000년에는 1,438가구 4,938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5,995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