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정가후(鄭可侯)
시조 정가후(鄭可侯)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야성군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야성으로 하였다.
인물
고려 때 정교(鄭交)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정언국(鄭彦國)은 교위(校尉), 정당유(鄭唐裕)와 정자피(鄭自皮)는 중랑장, 정송(鄭松)은 문하시중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을현(鄭乙賢)은 군수를 지냈고, 정태진은 랑장(郞將), 정득화(鄭得和)는 현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자함(鄭自咸)은 판관, 정창국(鄭昌國)은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정담(鄭湛)은 경서에 통달하였고 병서를 습득하였다. 1571년 24세 때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돌격장(突擊將)이 되었고, 1589년(선조22) 무과에 급제하여 도호부판관(都護府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 청주목사, 1592년 김제군수, 같은해 4월 13일 왜적과 싸워 전사를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兵曺參判)에 추증되었다.
세거지
-경상북도 영양군 도고동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가곡동
-경북 청송군 부남면 감연동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야성(野城)은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옛 지명으로 일찍이 삼한시대에 야시홀(也尸忽) 또는 우시국(于尸國)으로 불리웠고 고구려 때에는 시야물군(尸也物郡)이라 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치고 진안현(眞安縣) · 능선현(稜善縣) · 송생현(松生縣 : 청송) 등의 영현을 관할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영덕현(盈德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예주(禮州 : 영해)에 속하였다가, 후에 다시 분리시켜서 현령(縣令)을 두었다. 1515년(태종 15)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현령(縣令)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안동부 영덕군이 되었고 이듬해 경상북도 영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영해군이 영덕군으로 폐합되었고 관내 8개 면이 4개 면으로 통합, 개편되었고 1979년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