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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安東金氏) - 구
유래
시조 : 김숙승(金叔承)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 김방경의 향사는 음력 10월 9일에 한다. 인물
- 김선 :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 김흔 : 김방경의 아들. 찬성사를 지냈다. - 김순(恂): 김방경의 아들. 삼사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 김윤(倫):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 김승용(承用) : 김선의 아들. 대제학을 지냈다. - 김승택(承澤) : 평장사를 지냈다. - 김영돈(永暾) : 유명한 무장(武將)이다. - 김영후(永煦) : 우정승을 지내고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 김질 : 좌의정을 지냈다. - 김수동(壽童) : 영의정을 지냈다. - 김찬(瓚) : 이조판서를 지냈다. - 김자점(自點) : 인조 때 영의정으로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구안동의 세는 꺾이게 되었다. - 김제갑(悌甲) : 원주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 김시양(時讓) : 판서를 지낸 청백리이다. - 김휘(徽) : 김시양의 아들. 이조판서를 지냈다. - 김득신(得臣) : 숙종 때의 시인이며 참판을 지냈다. - 김응하(應河) :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 김응해(應海) : 김응하의 동생. 훈련대장을 지냈다. - 김중기(重器) : 훈련대장을 지냈다. - 김구(九) : 백범(白凡). 독립운동가, 정치가. 3.1운동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8년에 항국독립당을 결성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되었으며, 해방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여 독립당 당수 등으로 있다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익정(金益精) : 문과(文科) 태조5년(1396)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김성시(金盛始, 1646 丙戌生) : 문과(文科) 숙종7년(1681)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시헌(金時獻,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선조21년(1588)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홍도(金弘度, 1524 甲申生) : 문과(文科) 명종3년(1548)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주우(金柱宇, 1598 戊戌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노순(金魯淳, 1721 辛丑生) : 문과(文科) 영조40년(1764) 충량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창협(金昌協, 1651 辛卯生) : 문과(文科) 숙종8년(1682)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주(金澍, 1512 壬申生) : 문과(文科) 중종34년(1539)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수항(金壽恒, 1629 己巳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수녕(金壽寧, 1436 丙辰生) : 문과(文科) 단종1년(1453)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등 모두 1118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17명, 무과 61명, 생원진사시 716명, 역과 10명, 의과 5명, 음양과 2명, 율과 6명, 주학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족보발간
- 경진보 : 1580년(조선 선조 13년)
- 기미보 : 1739년(조선 영조 15년) - 무술보 : 1778년(조선 정조 2년) - 을유보 : 1825년(조선 순조 25년) - 임인보 : 1902년(조선 고종 6년) - 을해보 : 1935년 - 기미보 : 1979년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에는 창녕국(昌寧國)인 소국이었다.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국(古陀倻國)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었고,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년(명종 27)에 도호부로 개칭되었고, 1204년(신종 7)에 대도호부로, 1308년(충선왕 즉위)에 복주목(福州牧)으로 계속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복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1361년에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83년(우왕 9)에는 안동도로 개편하였다가 1388년에 부사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석릉(石陵)·고령(古寧)·화산(花山)·능라(綾羅)·지평(地平)·일계(一界)·고장(古藏)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안동군, 1896년에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1931년 읍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 곧 안동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김씨(구)는
1985년에는 95,736가구 398,245명, 2000년에는 132,645가구 425,264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519,719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