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김취린(金就躪)
시조 김취린(金就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4세손이다. 김취린은 고려때에 호장중윤(戶長中尹)으로 거란(契丹)이 침법했을 때 격퇴한 공으로 문하시랑이 되고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야성(영덕)으로 하였다.
항렬자
27世
지(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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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世
호(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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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世
동(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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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世
희(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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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世
재(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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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世
진(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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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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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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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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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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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8世孫은 27代孫)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야성(野城)은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옛 지명으로 일찍이 삼한시대에 야시홀(也尸忽) 또는 우시국(于尸國)으로 불리웠고 고구려 때에는 시야물군(尸也物郡)이라 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치고 진안현(眞安縣) · 능선현(稜善縣) · 송생현(松生縣 : 청송) 등의 영현을 관할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영덕현(盈德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예주(禮州 : 영해)에 속하였다가, 후에 다시 분리시켜서 현령(縣令)을 두었다. 1515년(태종 15)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현령(縣令)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안동부 영덕군이 되었고 이듬해 경상북도 영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영해군이 영덕군으로 폐합되었고 관내 8개 면이 4개 면으로 통합, 개편되었고 1979년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야성김씨는
1985년에는 755가구 3,692명, 2000년에는 1,099가구 3,401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191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