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김승경(金昇景)
시조 김승경(金昇景)은 지금의 평택군 진위면에서 김원주(金元柱)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세종 때 과의교위행대호군(果毅校尉行大護軍)으로 함경도 단천(端川)에 파견되어 정착하여 살면서 진위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진위김씨의 시조는 김승경의 6세손인 김기문(金起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까닭은 김기문이 진위김씨로서 맨 처음 등과하면서 과식시지(科式試紙)에 6대조까지 살았던 진위를 본향으로 적었고 또 그가 진위김씨를 세상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진위김씨가 김기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시조묘는 함경도 단천군 이중면 두우리에 있다.
인물
김승경의 6세손인 김기문은 김여(金礪)의 아들로 자는 금숙(禁叔)이고, 1535년(중종 30) 출생했고,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좌랑(刑曹佐郞), 정랑(正郞)과 명천현감(明川縣監) 등을 거쳐 진성 도호부사를 지내고 진성군(眞城君)에 추봉되었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기문(金起門, 1535 乙未生) : 문과(文科) 선조1년(1567) 식년시 병과(丙科)
김인남(金仁男, 1598 戊戌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기문(金起門, 1535 乙未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명종16년(1561) 식년시 삼등(三等)
* 모두 3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무과 1명, 생원진사시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세거지
1930년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하운승리에 36가구, 함경남도 단청군 북두일면 대흥리, 신덕리, 용천리에 47가구가 살았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평택
진위(振威)는 경기도 평택시(平澤市)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고구려 때에는 부산현(釜山縣: 古淵達部曲·金山·松村活達縣)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진위현으로 개칭하였고, 수성군(水城郡: 水原)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도 수주(水州: 水原)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현령(縣令)을 파견함으로써 독립하였다. 1398년(태조 7)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충청도(忠淸道)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433년(세종 15)에는 수원의 속현이었던 영신현(永新縣)이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위군이 되어 공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수원군의 15개면과 충청남도 평택군 일원으로 병합되었다. 1938년에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함으로 진위군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위김씨는
1985년에는 349가구 1,378명, 2000년에는 386가구 1,235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474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진위김씨는 입북 이후 해방 당시까지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과 북두일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다가 1.4 후퇴 때 족보를 갖고 올 겨를이 없어 맨손으로 월남하여 뿌리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그들이 족보를 찾게 된 미담이 있다.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에 사는 진위김씨의 종부가 있었는데 어렵게 사는 처지이면서도 시가의 혈맥을 이어오는 족보만은 소중이 간직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전란 중에 항아리에 넣어 땅 속에 묻어 두면서까지 간수함으로써 오늘날 진위김씨의 계보를 확인하는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