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김이(金怡)
시조 김이(金怡, 1265~1327)의 초명은 지정 또는 정미 이며 호는 열심, 은지. 시호는 광정 이다.
그는 나이가 10여세 때 도평의사서가 되고 1288년(고려 충렬왕 14년) 23세에 장흥부 수령이 되었다. 1290년 계단(契丹)이 쳐들어 왔을 때 농사를 짓지 말고 요충지의 방어에 주력하라는 조정의 명이 떨어 졌는데도 농사를 짓게 하여 인근 지역까지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1298(충렬왕 24년)년에는 충선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 왔으며 왕의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간신배를 제거 하는데 공이컸다. 1313년(충선왕 5년) 밀직사사를 거쳐 첨의평리에 수성보절공신이 되고, 1320년 찬성사로 경산군에 봉해졌으며 1326년 첨의 정승, 1327년 중찬이 되고 죽은 후에 보절동덕공신이 추증되었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나 '전고대방' 등에는 김이가 시조라고 기록된것 이외에 그의 선대나 후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춘양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주요 인물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
춘양(春陽)은 현재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 지역으로 신라 때에는 고사마현(古斯馬縣)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옥마현(玉馬縣)으로 바뀌었고, 내령군(奈靈郡: 榮州)의 영현(嶺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화현(奉化縣)으로 개편되어 현재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안동(安東) 속현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설치하여 독립하였는데, 이때 안동부 소속의 미량부곡(彌良部曲)·매토부곡(買土部曲)을 편입하였다. 조선 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부가 혁파되어 문수산 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년(숙종 9) 순흥이 복구되면서 이양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 대에 오지인 이 고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태백산 사고로 불리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安東府) 봉화군(奉化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13년에 교통편의를 위해 군 청사를 춘양면(春陽面)으로부터 봉화면(奉化面)으로 옮겼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내면과 북면이 봉성면으로 통합되었고, 1956년에 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8년 봉화면이 봉화읍(奉化邑)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춘양김씨는
1985년에는 84가구 359명, 2000년에는 30가구 9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0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