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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나씨(羅州羅氏)
유래
시조 : 나부(羅富)
시조 나부(羅富)는 중국 송(宋) 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고려 중엽에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나라가 멸망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귀화 후 전라도의 여황(나주)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여황으로 하였으나, 고려 성종 때 여황이 나주로 바뀌면서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 수 없어 나득규(羅得○)를 1세조로하고 있다. 인물
나득규 부터 4세손 나수영(羅守永)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나수영이 다섯 아들을 두었고, 5명이 모두 관직에 나갔으므로 이들을 중시조로 하여 5파로 분파되었으며, 그 후에 수십개의 지파로 분파되었다.
첫째인 나위(羅位)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제수받았으므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평안도 용강(龍剛)과 성천(成川) 일대에 살고있다. 둘째인 나계(羅桂)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으므로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강화 일대에 살고있다. 셋째인 나석(羅碩)은 사온서직장(司?署直長) 영동정(令同正)을 지냈으며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젔으므로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전라도 김제 일대에 살고다. 넷째인 나세(羅世)는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젔으므로 연안군파(延安君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는 1380년(고려 우왕 6)에 해도원수(海道元帥)로서 금강하구의 진포(鎭浦)에서 전함 100척으로 서해안으로 침입하던 왜구의 배 500척을 최무선(崔茂宣)이 발명한 화약을 이용, 공격하여 완파하는 무공을 세웠으며, 그 후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충청도 서천 일대에 살고있다. 다섯째인 나원(羅源)은 사온서직장(司?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전라도 나주 일대에 살고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나세찬(羅世纘)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탁영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나만영(羅晩榮, 1652 壬辰生) : 문과(文科) 숙종19년(169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나신국(羅藎國, 1524 甲申生) : 문과(文科) 명종21년(1566) 별시 병과(丙科) 나사선(羅士○) : 문과(文科) 중종29년(1534) 별시 병과(丙科) 나순영(羅純榮, 1857 丁巳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별시2 병과(丙科) 나태성(羅台晟, 1764 甲申生) : 문과(文科) 순조28년(1828) 식년시 병과(丙科) 나석희(羅錫熙, 1817 丁丑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식년시 병과(丙科) 나의소(羅宜素, 1587 丁亥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식년시 병과(丙科) 나충좌(羅忠佐, 1728 戊申生) : 문과(文科) 영조26년(1750) 식년시 병과(丙科) 나두영(羅斗永, 1859 己未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59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8명, 무과 29명, 생원진사시 102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나주나씨는
1985년에는 23,284가구 99,090명, 2000년에는 33,600가구 108,139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96,018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