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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남씨(英陽南氏)
유래
시조 : 남홍보(南洪輔)
원조 남민(南敏)의 원래의 이름은 김충(金忠)이다. 김충은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형주자사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14년,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 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의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며 여남(汝南)에서 왔다며(혹은 남쪽에서 왔다고) 성을 남(南)씨로 하고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함으로써 남씨가 시작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에 김충의 후손인 홍보, 군보, 광보 세명의 형제가 공을 세워 남홍보(南洪甫)는 영양군, 남군보(南君甫)는 의령군, 남광보(南匡甫)는 칠성(고성)군에 봉해져서 각각 세 본관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중시조를 1세 조상으로하고 대를 이어오고있다. 원조인 김충이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 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하였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남씨는 성은 틀리나 원조는 김충으로 같다. 인물
고려에서 검교예빈시경을 지낸 남숙손(南淑孫)과 중랑장 남영번(南永蕃)이 뛰어났으며 영번의 아들 남수(南須)는 용담 현령을 지냈다. 한편 임진왜란때 훈련원 판관을 지낸 남율(南慄)과, 거창부사 남노명(南老明), 순천부사 남구명(南九明) 등이 이름을 날렸으며 학자 남제명(南濟明)은 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하고, 남공수(南公壽)는 계각촬요(溪刻撮要)를 저술하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남술의(南述毅, 1744 甲子生) : 문과(文科) 정조1년(177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남복규(南復圭, 1559 己未生) : 문과(文科) 선조33년(1600) 별시 을과(乙科) 남제만(南濟萬, 1712 壬辰生) : 문과(文科) 영조17년(1741) 식년시 병과(丙科) 남몽뢰(南夢賚, 1620 庚申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식년시 병과(丙科) 남경희(南景羲, 1758 戊寅生) : 문과(文科) 정조1년(1777) 증광시 병과(丙科) 남천한(南天漢, 1607 丁未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병과(丙科) 남경룡(南景龍, 1725 乙巳生) : 문과(文科) 정조7년(1783) 식년시 병과(丙科) 남태운(南泰運, 1695 乙亥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식년시 병과(丙科) 남석로(南碩老, 1709 己丑生) : 문과(文科) 영조30년(1754) 증광시 병과(丙科) 남용견(南龍見,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3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5명, 무과 3명, 생원진사시 84명, 역과 4명, 의과 14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
영양(英陽)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지역이었다. 신라에 병합되어 고은현(古隱縣)이 설치되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유린군(有隣郡: 寧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고은현을 영양군(英陽郡)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 예주(禮州: 寧海)에 병합되었다가 1179년(명종 9)에 감무(監務)를 두어 영양현으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다시 영해부로 편입되었다가, 1682년(숙종 8)에는 청기현과 합하여 독립현이 설치되어 독립행정단위를 구성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진보현(眞寶縣)의 입암면(立巖面)·석보면(石保面)을 병합하여 6개 면이 되었다. 1979년 영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양남씨는
1985년에는 15,146가구 62,763명, 2000년에는 21,969가구 69,155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82,272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