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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노씨(新昌盧氏)
    유래
     시조 : 노지유(盧智儒)
    시조 노지유(盧智儒)는 교하노씨(交河盧氏)의 1세조 노강필(盧康弼)의 증손자로 평장사(平章事) 의정공(懿貞公) 노영순(盧永醇)의 둘째 아들이다.

    노지유가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나라에 무공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교하노씨에서 분관하여 신창을 본관으로 하고있다.
    인물
    노지유(盧智儒)의 아들 노후(盧珝)가 고려시대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노후의 손자 노순(盧純)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진력하여 저서로 일생을 마쳤다.

    노지유의 6세손 어모 장군(禦侮將軍)에 제수된 노규부((盧赳夫)는 성종때 지방관아로 옮겨와 후손들이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에 오백삼십여년을 살아왔으며, 7세손 건공장군(建功將軍) 노미수(盧眉壽)는 용장(勇將)이었으며 8세손 부장공(部將公) 노식(盧軾)은 문무에 현달(顯達)하였다. 단성현감 낙헌공(樂軒公) 노집(盧輯)은 청렴하였다.

    조선 선조 때 노순(盧錞)은 성리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서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보급을 담당했으며,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노정(盧鋌)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하여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노천익(盧天翼), 참의(參議) 노희창(盧喜昌)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주요 인물
    세거지
    - 충청남도 대덕군 구칙면 일원
    - 충청남도 대덕군 단동면 일원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미동리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대전광역시 중구

    항렬자
    20世
    淵(연)
    21世
    箕(기)
    22世
    斗(두)
    23世
    泰(태)
    24世
    邦(방)
    25世
    鎬(호)
    26世
    洙(수)
    27世
    柄(병)
    28世
    燁(엽)
    29世
    在(재)
    30世
    鍾(종)
    31世
    永(영)
    32世
    -
    33世
    -
    34世
    -
    35世
    -
    36世
    -
    37世
    -
    38世
    -
    39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1世孫은 20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溫陽)에 속하게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신창을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되어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 후 조선에 와서는 태조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으로 승격되어 홍주부 아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아산군 학성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17년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1995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이 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창노씨는
    1985년에는 474가구 1,979명, 2000년에는 528가구 1,708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152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