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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강씨(晋州姜氏)
유래
시조 : 강이식(姜以式)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의 강이식 장군을 모신 봉산사에서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향한다. 인물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강희맹(姜希孟, 1424 甲辰生)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친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강백년(姜栢年)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숭덕(姜崇德) : 문과(文科) 중종17년(152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영(姜○, 1661 辛丑生) : 문과(文科) 숙종22년(169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세구(姜世龜) : 문과(文科) 숙종5년(1679)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신(姜紳, 1543 癸卯生) : 문과(文科) 선조10년(1577)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전(姜銓) : 문과(文科) 중종17년(1522)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자평(姜子平, 1430 庚戌生) : 문과(文科) 세조3년(1457) 친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강태수(姜台壽, 1479 己亥生) : 문과(文科) 중종6년(151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강안중(姜安重) : 문과(文科) 세조8년(1462) 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등 모두 90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23명, 무과 144명, 생원진사시 512명, 역과 16명, 의과 8명, 음양과 3명, 주학 1명) 족보발간
대표적 파는 박사공 삼형제파, 은열공파, 인헌공파인데, 각 파는 도시조 강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족보를 같이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중 박사공 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로 구분되고, 최근에는 족보도 같이 만들고 있다. 3형제파가 진주강씨의 3대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하여 인구가 가장 많다.
항렬자
소감공파(少監公派) - 위용(渭庸)
관서공파(關西公派) - 원노(元老)
은열공파(殷烈公派) - 민담(民膽) (1) 밀직(元吉) 학사(元鑽) 호부사(元鐫) 사평(元咸) 진사(元益)공파
(2) 첨사공 원감파(元鑑派)
(3) 첨사공 원감(元鑑) 후
박사공파(博士公派) - 계용(啓庸) (1) 진원군(晉原君) 창귀파(昌貴派)
(2) 대장군파(大將軍派) - 창부(昌富)
인헌공파(仁憲公派) - 감찬(邯贊)(1)
인헌공파(仁憲公派) - 감찬(邯贊)(2)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
진주(晉州)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1985년에는 223,578가구 941,094명, 2000년에는 300,724가구 966,71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968,109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 진주강씨중앙종회 : (02)779-0695
-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