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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당씨(密陽唐氏)
유래
시조 : 당성(唐誠)
시조 당성(唐誠)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사람으로 그의 선대는 송(宋)나라 정종때의 승상(丞相)에 올랐던 당각(唐恪)의 7세손이라 한다. 시조 당성은 원나라 말기에 병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고려때에 사평순위부평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개국 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로서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관장하였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녹권(錄券)과 상전(賞田) 15결(結)을 하사받았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러 태종 때에 밀양을 사적(賜籍)받아 본적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당성은 학문에 정통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야사(野史)의 기록에는 태종 때 영의정에 오른 성석린(成石璘)을 위기에서 구해준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 말에 왜 구(倭寇)가 승천부(昇天府 :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 이를 격퇴시키고 개선한 양백연(楊伯淵)이 법률을 어기어 죽음을 당하자 막료(幕僚)로 있던 성석린이 연루되었는데, 도통(都統) 최영(崔瑩) 장군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자 사평부평사(司評府評事)로 있던 당성이 말하기를 "죄(罪)는 법에 맞게 다스리는 것인데, 법문이 이와 같거늘 법률을 고치라 하니 법률이 먼저요? 공(公)이 먼저요?" 하면서 성석린의 억울함을 알고 가볍게 다스렸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한 성석린은 당성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며 "생전에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를 죽었다고 어찌 잊을것인가, 일생동안 다 못 갚아 죽어도 못 잊겠네" 라고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인물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한 당성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당몽현(唐夢賢)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했고, 차남 당몽량(唐夢良)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원사공(院使公) 당몽현(唐夢賢)의 손자 당유징(唐有徵)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당언우(唐彦佑)는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둘째 당언필(唐彦弼)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 도호부사(慶源都護 府使)를 역임했으며, 막내 당언량(唐彦良)은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선무원 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동추공(同樞公) 당몽량(唐夢良)의 후손에서는 세종 때 출생하여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詞果)를 지낸 당효원(唐孝元 : 몽량의 맏아들)과 그의 아들 당적(唐勣, 통훈대부로 삭녕 군수를 지냄)이 유명했으며, 당윤문(唐允文)은 중종 때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봉상시정(奉常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당득흥(唐得興)과 당계흥(唐繼興)이 뛰어났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당윤흥(唐胤興),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당호건(唐好健),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당건(唐健), 학자(學者) 당후민(唐厚民),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당국(唐國) 등이 가문을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당윤문(唐允文) : 문과(文科) 중종34년(1539) 별시 병과(丙科)
당의남(唐義男,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당효달(唐孝達)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세종29년(1447) 식년시 이등(二等) 당윤문(唐允文)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중종20년(1525) 식년시 이등(二等) 당윤문(唐允文)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중종20년(1525) 식년시 이등(二等) 당효명(唐孝明)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세종29년(1447) 식년시 일등(一等) * 모두 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무과 1명, 생원진사시 4명)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
밀양(密陽)은 지금의 밀양시 일원에 있던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으며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었다고 한다.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 밀벌 또는 미리벌)이 설치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6)에는 밀주(密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 慶州)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현으로 승격하였다.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는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읍으로, 1989년 시로 승격하여 독립하였다. 1995년 밀양군이 밀양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밀양당씨는
1985년에는 194가구 869명, 2000년에는 300가구 1,01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014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