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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도씨(星州都氏, 성산, 팔거)
    유래
     시조 : 도순(都順)
    시조 도순(都順)의 선대는 중국 여양 사람이나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도순은 저리상서를 역임했으며 손자인 도유덕이 고려때에 명경진사로 종부판사에 봉직하고 성산(성주)군에 봉해 졌으므로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으로 하였다.(성주도씨족보)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미(都彌)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도미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미는 본래 백제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정결하기로 소문났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후 도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그를 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진(都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성주에 살아오면서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물
    1세조 도순(都順)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도유도(都有道)와,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도유덕(都有德)을 아들로 두어 이들이 성주도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도순(都順)의 현손(玄孫)인 도홍정(都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도효안(都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도 우왕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장(副將)으로 충청과 전라도(全羅道)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88년(우왕 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李仁任)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한편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도응(都膺)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 (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봉차령(奉車令) 도천우(都千遇)의 아들 도흥(都興)은 공민왕 때 무신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종때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도형(都衡)이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지냈으나 조광조(趙光祖)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후 향리에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순조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운 도응유(都應兪)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그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도성유(都聖兪)와 평양서윤(平壤庶尹) 도경유(都慶兪)가 유명했으며, 도신수(都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대구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도신징(都愼徵)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도영성(都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한 도석훈(都錫壎), 한성우윤(漢城右尹) 도원결(都元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도석훈(都錫壎, 1812 壬申生) : 문과(文科) 고종6년(186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도인엽(都寅曄, 1769 己丑生) : 문과(文科) 순조25년(1825) 식년시 을과(乙科)
     도진삼(都鎭三, 1863 癸亥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을과(乙科)
     도대하(都大夏, 1650 庚寅生) : 무과(武科) 숙종25년(1699) 식년시 병과(丙科)
     도여국(都與國, 1564 甲子生) : 무과(武科) 선조17년(1584) 별시 병과(丙科)
     도신국(都藎國, 1560 庚申生) : 무과(武科) 선조17년(1584) 별시 병과(丙科)
     도이유(都以○, 1583 癸未生) : 무과(武科) 광해군5년(1613) 증광시 갑과(甲科)
     도원량(都元亮, 1556 丙辰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도유빈(都有○)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도집중(都執中, 1666 丙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28년(1702) 식년시
    등 모두 3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무과 6명, 생원진사시 2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항렬자
    29世
    환(煥)
    30世
    기(基)
    31世
    종(鍾)
    32世
    법(法)
    33世
    격(格)
    34世
    혁(爀)
    35世
    숙(塾)
    36世
    -
    37世
    -
    38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0世孫은 29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도씨는
    1985년에는 10,374가구 42,610명, 2000년에는 14,350가구 46,18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53,066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