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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권씨(安東權氏)
유래
시조 : 권행(權幸)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하여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이 우세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인물
고려시대 추밀원부사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인물이며, 권수평의 증손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을 피운다. 권근(權近, 1352~1409) :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고려 공민왕 때 17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려 우왕 때 성균 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역임. 조선 태조 때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공을 세웠다. 예문관 대제학, 대사성,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은 후에 이황, 장현광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의 저서로는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등이 있다. 권제(權蹄, 1387~1445) : 권근의 둘째 아들. 호는 지재(止齎), 시호는 문경(文景). 태종 때 집현전 부제학, 한성부윤을 지내고, 세종때(1429년) 명나라에 진헌사로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이조판서에 승진, 1436년 '동국연대'를 편찬하고, 다음해에 예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원사, 지춘추원사 등을 지냄. 1440년 '고려사' 편찬에 참여, 1445년(세종 27년)우찬성이 되어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왕에게 바침. 권벌(權橃, 1478~1548) : 시호는 충정. 호는 충재(沖齎). 고려 중종때 예조판서를 지냄. 선조초에 좌의정에 추증됨. 권철(權轍, 1503~1578) : 권율의 아버지. 명종때 3정승을 두루 지며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 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을 정도 이었다. 권율(權慄, 1537~1592) :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장. 영의정 권철의 아들.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로 금산군 이산사에서 왜군을 대파, 전라도 순찰사로 수원 독왕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행주산성에서 3만 대군과 싸워 적병 2만4천명의 사상자를 내게한 행주대첩의 공을 세워 도원수에 오르고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음. 정유재란에서도 공을 많이 세워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됨. 권협(權悏, 1553~1618) : 시호는 충정. 임진왜란 때 장령으로 서울 사수를 주장. 1597년 정유재란 때 고급사로 명나라에가서 원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데 성공, 귀국후 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년 길창군에 봉해짐. 1607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함. 권상하(權尙夏, 1641~1721) : 호는 수암(遂菴). 시호는 문순(文純). 조선의 학자. 송시열의 수제자. 송시열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음. 숙종이 총애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함. 이이, 송시열로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임. 글씨에도 뛰어남. 권일신(權日身, 1751~1791) : 조선시대의 천주교인. 교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의 사위. 남인의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다 1782년(정조 6년)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1782년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1787년 지금의 명동성당(1898년 축성) 부근 명례방(明禮坊)에서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등 조선의 교인들이 모여 직제를 결성하여 조선천주교회를 창립, 주교가 되어 1789년 교우 우모(禹某)를 북경에 보내 북경에온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나 노모를 생각하여 신앙에 동요가 생겨 배교(背敎)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권람(權擥, 1416 丙申生) : 문과(文科) 문종0년(1450)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권복(權福, 1478 戊戌生) : 문과(文科) 연산군9년(1503) 별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권홍(權弘)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권건(權建) : 문과(文科) 성종8년(1477)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권제(權踶, 1387 丁卯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친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권홍(權弘, 1467 丁亥生) : 문과(文科) 연산군3년(1497)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권극중(權克中) : 문과(文科) 태종11년(1411)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권세형(權世衡) : 문과(文科) 성종22년(149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권경희(權景禧, 1451 辛未生) : 문과(文科) 성종9년(1478)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권성(權晟) : 문과(文科) 중종3년(1508)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1398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67명, 무과 99명, 생원진사시 913명, 역과 9명, 의과 4명, 음양과 1명, 율과 5명) 세거지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하동 경북 안동군 북후면 연곡동 경북 안동군 풍천면 가곡동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경북 영주시 영주동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족보발간
성화보 : 1476년(조선 성종 7년) -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
을사보 : 1604년(조선 선조 38년) 갑오보 : 1654년(조선 효종 5년) 신사보 : 1701년(조선 숙종 27년) 갑인보 : 1734년(조선 영조 10년) 후갑인보 : 1794년(조선 정조 18년) 정미보 : 1907년(조선 순조 1년) 신축보 : 1961년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에는 창녕국(昌寧國)인 소국이었다.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국(古陀倻國)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었고,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년(명종 27)에 도호부로 개칭되었고, 1204년(신종 7)에 대도호부로, 1308년(충선왕 즉위)에 복주목(福州牧)으로 계속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복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1361년에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83년(우왕 9)에는 안동도로 개편하였다가 1388년에 부사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석릉(石陵)·고령(古寧)·화산(花山)·능라(綾羅)·지평(地平)·일계(一界)·고장(古藏)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안동군, 1896년에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1931년 읍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 곧 안동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1985년에는 135,135가구 558,793명, 2000년에는 196,566가구 629,291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696,317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계파
검교공파, 광석파, 군기감공파, 동정공파, 별장공파, 복야공파, 부정공파, 부호장공파, 추공파, 수중공파, 시중공파, 좌윤공파, 중윤공파, 추밀공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