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 1 |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BC.69 ~ AD.4)
 | BC.57 ~ AD.4 | 성은 박(朴). 박혁거세(朴赫居世). 사로 6촌장(六村長) 세력을 규합하여 사로국(斯盧國)을 세움. BC.37년 경주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고 BC.32년 궁실을 지어 나라의 기틀이 잡음. |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 24)
 | 4 ~ 24 | 성은 박(朴). 휘는 남해(南解).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 ~ 57)
 | 24 ~ 57 | 성은 박(朴). 휘는 유리(儒理). 남해차차웅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姓)을 내렸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했다고 함.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 
	
		| 4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 80)
 | 57 ~ 80 | 성은 석(昔). 휘는 탈해(脫解) 또는 토해(吐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 
	
		| 5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 112)
 | 80 ~ 112 | 성은 박(朴). 휘는 파사(婆娑).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 6 |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 ?)
 | 112 ~ 134 | 성은 박(朴). 휘는 지마(祗摩) 또는 지미(祗味). 파사이사금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 
	
		| 7 |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 ?)
 | 134 ~ 154 | 성은 박(朴). 휘는 일성(逸聖).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 ~ 184)
 | 154 ~ 184 | 성은 박(朴). 휘는 아달라(阿達羅). 일성이사금의 맏아들.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 등 내치에 힘씀. | 
	
		| 9 |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 196)
 | 184 ~ 196 | 성은 석(昔). 휘는 벌휴(伐休) 또는 발휘(發暉). 탈해이사금의 손자 | 
	
		| 10 |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 ~ 230)
 | 196 ~ 230 | 성은 석(昔). 이름[諱]는 내해(奈解). 벌휴이사금의 손자. | 
	
		| 11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 247)
 | 230 ~ 247 | 성은 석(昔). 휘는 조분(助賁) 또는 제분(諸賁). 벌휴이사금의 손자. | 
	
		| 12 |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 ~ 261)
 | 247 ~ 261 | 성은 석(昔). 휘는 첨해(沾解). 벌휴이사금의 손자, 조분이사금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 13 |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 284)
 | 262 ~ 284 | 성은 김(金). 휘는 미추(味鄒). 김씨 왕가의 시조.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 | 
	
		| 14 |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 ~ 298)
 | 284 ~ 298 | 성은 석(昔). 휘는 유례(儒禮). 조분이사금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 15 |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 ~ 310)
 | 298 ~ 310 | 성은 석(昔). 휘는 기림(基臨) 혹은 기립(基立). 이전까지 국호를 서라벌 또는 계림이라 했으나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 16 |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 ~ 356)
 | 310 ~ 356 | 성은 석(昔). 휘는 흘해(訖解). 걸해이질금(乞解尼叱今)이라고도 함. 기림이사금이 후계자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 ~ 402)
 | 356 ~ 402 | 성은 김(金). 휘는 내물(奈勿) 또는 나밀(那密)이라고도 함. 구도갈문왕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 흘해이사금이 후계자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함.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 
	
		| 18 |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 ~ 417)
 | 402 ~ 417 | 성은 김(金). 휘는 실성(實聖).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내물마립간이 죽은 후 어린 태자 눌지를 대신해 왕위를 물려 받음. 
			눌지를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 
	
		| 19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 ~ 458)
 | 417 ~ 458 | 성은 김(金). 휘는 눌지(訥祗). 내물마립간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함.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 20 |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 ~ 479)
 | 458 ~ 479 | 성은 김(金). 휘는 자비(慈悲). 눌지마립간의 맏아들.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 21 |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 ~ 500)
 | 479 ~ 500 | 성은 김(金). 휘는 소지(炤知/照知) 또는 비처(毗處). 자비마립간의 맏아들.   | 
	
		| 22 | 지증왕[智證王] (437 ~ 514)
 | 500 ~ 514 | 성은 김(金). 휘는 지대로(智大路).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함. 내물마립간의 증손.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국명을 신라로 확정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 23 | 법흥왕[法興王] (? ~ ?)
 | 514 ~ 540 | 성은 김(金).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 24 | 진흥왕[眞興王] (534 ~ 576)
 | 540 ~ 576 | 성은 김(金).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 
	
		| 25 | 진지왕[眞智王] (? ~ ?)
 | 576 ~ 579 | 성은 김(金). 휘는 사륜(舍輪) | 
	
		| 26 | 진평왕[眞平王] (? ~ 632)
 | 579 ~ 632 | 성은 김(金). 휘는 백정(白淨) | 
	
		| 27 | 선덕왕[善德王] (? ~ ?)
 | 632 ~ 647 |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 선덕여왕.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 28 | 진덕왕[眞德王] (? ~ 654)
 | 647 ~ 654 |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蔓). 진덕여왕 | 
	
		| 29 | 무열왕[武烈王] (604 ~ 661)
 | 654 ~ 661 |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 
	
		| 30 | 문무왕[文武王] (? ~ 681)
 | 661 ~ 681 | 성은 김(金).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 ~ 673) 죽음. | 
	
		| 31 | 신문왕[神文王] (? ~ 692)
 | 681 ~ 691 |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또는 명지(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 32 | 효소왕[孝昭王] (643 ~ 702)
 | 692 ~ 702 | 성은 김(金). 휘는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 33 | 성덕왕[聖德王] (? ~ 737)
 | 702 ~ 737 | 성은 김(金).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 34 | 효성왕[孝成王] (? ~ 742)
 | 737 ~ 742 | 성은 김(金).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 35 | 경덕왕[景德王] (? ~ 765)
 | 742 ~ 765 | 성은 김(金).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 36 | 혜공왕[惠恭王] (765 ~ 780)
 | 765 ~ 780 | 성은 김(金).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 37 | 선덕왕[宣德王] (? ~ 785)
 | 780 ~ 785 | 성은 김(金).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 
	
		| 38 | 원성왕[元聖王] (? ~ 798)
 | 785 ~ 798 | 성은 김(金).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 39 | 소성왕[昭聖王] (? ~ 800)
 | 798 ~ 800 | 성은 김(金).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 40 | 애장왕[哀莊王] (788 ~ 809)
 | 800 ~ 809 | 성은 김(金).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 41 | 헌덕왕[憲德王] (? ~ 826)
 | 809 ~ 826 | 성은 김(金).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 42 | 흥덕왕[興德王] (? ~ 836)
 | 826 ~ 836 | 성은 김(金).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 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 43 | 희강왕[僖康王] (? ~ 838)
 | 836 ~ 838 | 성은 김(金).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 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 44 | 민애왕[閔哀王] (? ~ 839)
 | 838 ~ 839 | 성은 김(金).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 45 | 신무왕[神武王] (? ~ 839)
 | 839 | 성은 김(金). 휘는 우징(祐徵). 38대 원성왕의 증손자.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 
	
		| 46 | 문성왕[文聖王] (? ~ ?)
 | 839 ~ 857 | 성은 김(金).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 47 | 헌안왕[憲安王] (? ~ 861)
 | 857 ~ 861 | 성은 김(金). 휘는 의정(誼靖) 또는 우정(祐靖).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 후사가 없어 경문왕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 48 | 경문왕[景文王] (? ~ 875)
 | 861 ~ 875 | 성은 김(金). 휘는 응렴(膺廉) 또는 의렴(疑廉). 희강왕의 손자. | 
	
		| 49 | 헌강왕[憲康王] (? ~ 886)
 | 875 ~ 886 | 성은 김(金). 휘는 정(晸). 경문왕의 맏아들.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 
	
		| 50 | 정강왕[定康王] (? ~ 887)
 | 886 ~ 887 | 성은 김(金).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 51 | 진성왕[眞聖王] (? ~ 897)
 | 887 ~ 897 | 성은 김(金). 휘는 만(曼). 진성여왕.  경문왕의 딸. 음행(淫行)을 일삼고 정치가 어지러워져 나라가 혼란에 빠짐.  
			견훤(甄萱), 궁예(弓裔) 등 사방에서 반란의 무리가 생겨남.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남. | 
	
		| 52 | 효공왕[孝恭王] (? ~ 912)
 | 897 ~ 912 | 성은 김(金).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 53 | 신덕왕[神德王] (? ~ 917)
 | 913 ~ 917 | 성은 박(朴).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 54 | 경명왕[景明王] (? ~ 924)
 | 917 ~ 924 | 성은 박(朴).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 55 | 경애왕[景哀王] (? ~ 927)
 | 924 ~ 927 | 성은 박(朴). 휘는 위응(魏膺). 신덕왕의 아들. 경명왕의 동생. 
			왕건, 견훤 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함.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함. | 
	
		| 56 | 경순왕[敬順王] (? ~ 978)
 | 927 ~ 935 | 성은 김(金).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 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에서 여생을 보냄. |